1억원 같았던 9개월

방통위 상임위원은 최시중 위원장을 포함해 모두 5명입니다.여당 추천 인사가 위원장과 송도균 부위원장,형태근 상임위원 등 3명이고,야당 추천 인사는 이경자 상임위원과 이병기 상임위원 등 2명입니다.
갑작스레 이경자 위원 얘기를 꺼내려는 것은 정치적으로 쪽수에서 밀리는 방통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편향된(?) 발언을 방통위 관계자들이 보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그를 추천해준 민주당에서는 그닥 환대받지 못하는 것같습니다.방통위 출범 초기부터 최시중 위원장과 방통위 정책에 반대해온 민주당 내부에서 두 명의 야당 추천 위원이 제 몫을 못한다며 '소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습니다.정치적이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겠지요.그 즈음 이경자 위원을 면담했는데 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습니다."정치적 바람에 왔다갔다하는 것보다는 소신대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다잡던 모습도 지켜봤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되짚어보면 지난 9개월이 1억짜리 같았다는 이경자 위원의 회고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건배사에도 맘을 담았습니다.요즘 망년회 자리에서 많이 쓴다는 '당신멋져'로 건배사를 대신했습니다.아마도 그 말은 출입기자들도,동석했던 다른 상임위원들을 향한 것도 아니었을 겁니다.바로 자신에게 다짐하는 소리로 들렸습니다.'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
지난 23일 저녁 7시에 방통위가 자리한 KT 광화문 지사 15층 식당에서 방통위 기자단 송년간담회가 열렸습니다. 대기업이나 정부 부처마다 연말이면 의례히 송년간담회를 갖습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서로 부대끼며 사는 기자들과 밥이나 한끼 하자는 의미지만, 때로 각별한 의미로 남기도 합니다. 이번 송년간담회가 그랬습니다. 바로 이경자 위원 때문이었죠.
간담회는 상임위원들의 인사말로 시작됐습니다. 다들 한 해 고생했고 내년에도 잘 해보자는 식이었지요. 이경자 위원도 다르지 않았지만 지난 9개월에 대한 회고가 남달라 기억에 남습니다.
이경자 위원은 대뜸 지난 9개월은 1억짜리였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뭔소린가 하고 의안이 벙벙했지요. 바로 '파란만장'했다는 은유였습니다. 1억원이 파란 만원권으로 1만장이라서 그렇답니다. 1억원의 의미에 다들 폭소를 터뜨렸지만 그 말 끝의 씁쓸함과 고단함이란 이루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에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흔히 정치권의 몫으로 구성된 집단은 여야의 이해득실에 따라 정치적 바람을 타기 일쑤입니다.방통위도 예외는 아니지만 여느 집단과는 좀 달랐던 것같습니다.야당 몫 상임위원들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경자 위원은 소비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그동안 방통위의 온갖 정책을 견제해왔습니다.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 도입 때는 긴급통화나 보안문제 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이같은 문제를 개선해 서비스가 되도록 했습니다.인터넷전화에 가입했다가 화제 등의 비상사고가 터졌을 때 119로 전화했는데 소방서에서 전화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큰 일이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경자 위원은 방통위에서 요주의 대상 같은 존재입니다.걸핏하면 딴지를 걸고 나서기 때문이지요.정치적인 사안에서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지난 7월 18일은 이경자 위원에게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날이 아니었을까 합니다.야당 추천 KBS 이사였던 신태섭 동의대 교수가 학교쪽의 징계를 받아 자격 무효가 됐다는 이유로 방통위가 해임 결정을 내렸던 날입니다.이후 KBS 이사진 구성은 11명 중 여당 추천 몫이 6명으로 늘어 정연주 KBS 사장 교체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방통위 전체회의에서 신태섭 이사를 해임 결정을 내리는 절차상의 문제였습니다.대개 방통위 회의 안건은 24시간 전에 위원들에게 통보됩니다.그런데 신태섭 이사 해임안건은 긴급안건으로 한 시간 전에 상임위원들에게 통보됐습니다.워낙 중요한 사안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도 없이 급작스럽게 진행하는 것에 대해 이경자 위원이 강하게 반발했다고 합니다.최시중 위원장에게 "이러시면 안된다"고 강하게 항의했다고도 합니다.
11월 26일에는 야당과 방송시민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방송법 시행령 개정을 의결했습니다.핵심은 보도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을 소유할 수 있는 대기업 기준을 자산 규모 3조원에서 얼마로 늘릴 것인가였습니다. 그 수치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여당 몫 상임위원들은 10조원을 주장했고,야당 몫 상임위원들은 5조원을 주장했습니다.이병기 위원은 좀 더 유연하게 6조,8조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긴 했습니다.
당시 5조원으로 가자고 주장했던 이경자 위원이 시행령 원안(10조로 상향)에 반대한 변은 이랬습니다.IPTV법에는 10조인데,방송법은 5조로하는게 맞지 않고 10조로 맞춰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항변입니다.
"모든 방송 분야에 제한이 풀려있고,지금 하는 것은 제한적 규정 마련하려는 거다. 담뱃가게 어딨냐고 물으면 우리 집 옆이다고 답하고,너희 집 어딨냐고 물으면 담뱃가게 옆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IPTV법에서 10조원이라고 했다고 해서 일관성 지켜야 한다는 것은 논리의 허구다."
결국 이날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은 표결로 처리됐습니다.찬성 3표,반대 2표였습니다.제 기억으로 방통위가 출범한 이후 표결로 안건을 처리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같습니다.그리고 이 때를 계기로 방통위는 자연스레 첨예한 안건을 표결처리하는 습관을 갖게 됐습니다.가급적 전원합의제로 운영하겠다는 초기의 의지는 사라져버렸습니다.
엊그제 사이버 모욕죄 신설 등의 의원입법안에 대한 방통위 의견을 정할 때도 표결이 동원됐습니다.표결은 나쁜게 아니지만,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결로 사안을 가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아쉬움도 듭니다.위원회라는 조직이 필요한 이유는 일방적으로 한 사람(장관)이 결정을 내리는 독임제 부처가 아니라 민의를 기반으로 한 토론과 논의로 정책 결정을 이끌어낼 필요성에서 일 겁니다.방통위는 방송통신위원회거든요.
혹자들은(대개는 업계지만) 방통위 출범 이후 정책 결정이 느림보가 됐다고도 합니다.그러나 한편으론 다양하게 반추해보며 정책을 정할 수 있다는 장점도 없지 않습니다.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처럼 말이죠.
방통위에서 이경자 위원은 골칫거리입니다.방통위가 밀어부치는 일에 걸핏하면 시비를 걸고 나서기 때문이지요.정치적 의미로서의 훼방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소비자적 시각을 방송 및 통신정책에 반영했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가끔은 정치적인 이유에서였건 아니건 방통위의 독주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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